2022. 3. 23. 14:18ㆍ카테고리 없음
네비게이션의 화살표는 불빛 하나 없는 길로 우회전하라고 알려줬다. ‘이 길이 맞나’ 의심하며 좁은 골목으로 진입했다. 골목 안 길가 가게에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어두운 거리를 지나자 스마트폰 화면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를 알렸다. 새로 지은 듯하나 간판이 없는 건물 마당에 차를 세웠다. 건물 뒤에서 하-얀 사람이 뚜벅뚜벅 나타났다. 정문 뒤편에 있는 현관문을 휙 열자,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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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이 깨끗했다. 캐비닛도 복도도 새것 티를 숨길 수 없었다. 이제는 익숙한 가운과 덧신, 헤어캡을 장착하고 손도 씻었다. 공장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여기는 불 꺼진 외곽동네, 밤에만 문을 여는 도넛 공장이다. 적고 나니 꽤 동화적이야. 밤에만 문을 여는 도넛 공장이라니. 반면 이 동화적인 공장이 생긴 이유와 배경은 극히 현실적이다. 이 공장이야말로 현대 사회 식품산업의 고민이 응축된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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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베일 속의 도넛 공장: 던킨허브키친
일시:3월의 어느 늦은 밤
장소:성남시 던킨 허브 키친
탐험난이도: 3.5
획득물품: 라이브도넛 여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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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고민은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이곳의 정식 이름은 던킨허브키친. 84평 규모에 해썹 기준을 인정받을만큼의 위생 시설을 갖추었지만 이곳의 정식 명칭은 공장이 아닌 ‘치킨’임을 주목하자. 여기서는 던킨의 플래그십 라인업인 ‘던킨 라이브’와 ‘선릉역점’, ‘건대입구역점’ 등에서 판매하는 프리미엄 도넛들을 생산한다. 매일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도넛들은 새벽에 갓구어져 그날 아침, 바로 매장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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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 던킨처럼 큰 회사가 하지 않을 법한 일이다. 던킨은 한국의 식품 대기업 SPC 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던가. ‘왜 대기업이 이런일을?’ 취재 전 미리 보내주신 소개서에 답이 적혀 있었다. 브랜드 인식을 새롭게 한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다. 새로운 콘셉트의 제품을 만들어본다.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해 공장보다 작은 ‘허브 키친’을 만들었다. 이해는 되나, 궁금증이 시원히 풀리진 않는다. 이미 잘 되고 있는 그들에게 왜 새로운 콘셉트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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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던킨을 비롯한 대형 F&B 산업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F&B 산업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기 쉽다. 음식은 꽤 보수적인 산업이다. 인구 규모와 가격, 사람의 인식이 한정돼 있기 때문. 명품 가격은 몇십만원 올라야 뉴스인데 라면값은 60원만 올라도 뉴스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성장은 기업의 숙명이다. 성장은 보통 시장을 키우거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식품에서 시장을 키우는 건 해외진출, 부가가치를 높이는 건 가격인상이다. 아 글쎄 60원만 올려도 뉴스에 나온 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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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분이 말했다. “이제 사람들이 4천원짜리 꽈배기도 사먹잖아요”. 그렇다. 한동안 어여쁜 도넛들이 식품 업계에 새 화두를 몰고온바 있었다. 소위 '노티드 도넛 스타일'이라 대표되는 인스타그램풍 프리미엄 도넛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값나가는 도넛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프리미엄 전략으로 소비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자 큰 회사들도 비슷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대기업은, 마음먹고 작은 수제 도넛 공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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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리더는 ‘라인장’이란 직함의 한성훈 님이다. 그는 전국에 있는 SPC 그룹의 도넛 공장에서만 20년을 일해 오신 베테랑, 말 그대로 도넛맨이다. 도넛맨 한성훈 라인장은 도넛 생활 20년의 노하우에 걸맞게, 공장 곳곳을 자신의 집 부엌마냥 돌아다니며 도넛 공정 단계를 알려주셨다. 알려주시는 틈틈이 도넛의 발효 상황을 체크하고, 도넛 튀기는 분들을 감독하고 어떨 때는 도넛을 직접 튀겼다가 시연을 위해서 도넛에 글레이즈드 시럽을 직접 발라주시는 등, 말 그대로 ‘도넛 그 자체’셨다. 그분 덕에 도넛 만들어지는 순서를 한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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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은 간단히 말하면 가루와, 물이 만나 기름을 머금어 빚어지는 음식이다. 도넛도 빵류의 일종이니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가 도넛의 시작이자 근원이다. 밀가루는 다소 와일드한 기계 속에서 우당탕탕 반죽된다. 거대한 국수 기계처럼 생긴 기계를 거치며, 점차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진 반죽에 동그라미 틀을 눌러 동그란 모양으로 찍어져 나온다.